백인 중심의 사회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 7살에 일리노이주의Vernon Hills로 이사를 오게 됐습니다. 마을의 몇 안되는 아시안계 미국인의 한 명으로, 저는 쏟아지는 질문 공세를 받았습니다. "진짜 어디 출신이야?" "Joseph Lee와 성이 같은데, 친척이니?" "중국인이니? 눈이 중국인 같아"
엄마는 종종 점심으로 김치 볶음밥을 싸주었는데
, 이런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반 친구들이 점심시간에 꺼내 놓는 전형적인 미국식의 치킨 시저 샐러드와 피넛 버터 샌드위치사이에서 특이하고 지독한 냄새는 쉽게 눈에 띄었습니다. 저의 김치 볶음밥에 반 친구들은 호기심어린 혐오감을 보였고, 저는 친구들 앞에서 도시락을 먹는 대신 집으로 가져 왔습니다. 대부분의 어린 시절동안 저는 스스로를 한국인으로 생각했지만, 이윽고 저는 엄마에게 화가나 소리쳤습니다. "나는 미국사람이야! 앞으로 다시는 점심 싸지마, 알았어?!"
하지만
, 엄마에게 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 정체성이 제가 점심으로 무엇을 먹는지 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미국인'이라고 엄마에게 말한 지 1년쯤 후, 내가 얼마나 미국인으로 보이지 않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2010
년
5
월
그 날 저는 아마도
애버크롬비 셔츠와 스키니 진
,
아니라 해도 어쨌든 미국인스러운 것을 입고 있었습니다
.
엄마와 저는 동네 우체국의 주차장에 있었습니다
.
차를 빼는데
,
은색 차를 모는 한 여자가 우리의 하얀 토요타
4
Runner 의 보닛을 들이받았습니다.
엄마는 운전석에서 달려나갔습니다
. "I want aparlagy. (서툰 발음으로- 사과하세요)" 어머니는 요구했습니다. "Liddle damegey (피해는 적으니까)" 어머니는 비교적 온전한 보닛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I pay damegey. But you say sorry. (수리비는 내가 낼게요. 하지만 사과하세요)"
"너희 중국놈들(chinks)은 항상 똑같은 걸 바래! 당신이 나한테 돈은 가져갈 수 있어도, 그게 다야" 그 여자는 빽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중국으로 돌아가!"
"그냥 지금 사고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말한거잖아요. 그저 알량한 사과만 하라구요" 나는 목소리를 높여 끼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린 한국인이라구요, 이 인종 차별주의 무식쟁이야!"
그녀처럼 뻔뻔스러운 인종차별주의자는
- 게다가 어른-은 만나본 적이 없었고, 그 누구의 경멸적인 말도 그녀의 것만큼 저를 괴롭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씩씩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마음이 좁아서겠지만, 상식적인 말로 그녀에게 일침을 가한 것이 기분이 좋았습니다. 누구도 엄마에게 무례하게 굴도록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에야 저희 행동을 객관적으로 곰곰히 생각할 수 있었고, 누구든 나의 전통을 무시하는 것도 내버려둘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 여자에게 망설임없이 '나는 한국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스스로 미국인이라고 느끼는 만큼, 어쩌면 심지어 미국인으로 스스로 선택했다고 하지만, 제가 또한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 모든 혼란과 모순에도 불구하고
, 저는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저는 누구에게도 어떻게 나의 정체성이 일상 생활에서 조화를 이루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또한 정체성에 대한 어떤 무지한, 경멸의 말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저는 제가 먹고 싶을 때 점심으로 김치 볶음밥을 먹을 것입니다.
이세리
(
Seri Lee)
양은
ML-SAAF의 청소년 참가자로Vernon Hills High School 시니어 (senior) 학생이며, 시카고 대학교에서 역사와 심리학을 공부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첼로 연주, 양말 동물 인형 만들기, BuzzFeed의 퀴즈를 푸는 걸 즐겨하기도 합니다.